중국의 차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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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차에 대한 기록

차나무가 언제 발생하였는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역사서의 기술에 따르면, 약 5400년 전 중국에서는 이미 존재하였다고 한다. 당나라 시대에 '차신'이라 칭송되는 '육우733~804'의 저서인 다경(760년)에는 '차나무는 남방의 아름답고 진귀한 나무'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기원전 2737년에 농업과 의술의 신우로 숭배되던 신농이 약초의 효능을 조사하던 중에 우연히 중독되었고, 그 해독을 위해 찻잎을 먹었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해독 효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면서 차는 약재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차는 한나라 시대(B.C. 202~200)에 이르기까지 약재로 간주되면서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어 왔다.

지금처럼 차가 음료로 사용된 것은 삼국 시대(220~280년)의 일이다. 삼국지의 오나라편에 '차로 술을 대신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고려하여 볼 때, 이때부터 사람들이 술 대신 차를 마시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진나라 시대(265~420년) 안후이성에서는 황제에게 최고급 차를 헌상하는 '공차'를 최초로 시행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당시 차는 상류층의 기호품으로서 취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공차는 운송이 편리하도록 주로 고형의 차로 만들었다.

중국 차의 확산

남북조 시대(439~589년)에는 쓰촨성, 후베이성, 장쑤성, 저장성, 안후이성에서 차가 만들어졌으며, 산지도 점차 널리 확산되었다.

서민들에게도 널리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차 문화의 풍습이 생겨난 수나라 시대(581~618년)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지에서 담소를 나누면서 차를 즐길 수 있는 차관(찻집)이 생겨난 뒤, 다양한 차를 마시면서 차의 종류를 알아맞혀 승부를 겨루는 '투차'도 열렸다. 이 때부터 차는 기호음료로 발전되었고, 가공 기술도 발전해 나갔다.

당나라 시대(618~907)에는 중국 전역에서 차나무가 재배되면서 일상적으로 차를 마시는 풍습이 생겨났다. '다경'에는 차의 가공법, 차의 산지, 차 우리는 법, 마시는 법, 차 도구, 마음가짐 등이 소개되어 있어, 오늘날에는 '차의 성서'로 불릴 정도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 때 마신 차는 찐 찻잎을 절구에 빻아 딱딱하게 건조시킨 '병차'라는 고형차로, 둥근 떡의 모양이었다. 이것을 마실 때는 병차를 불에 쬐어 구워서 부순 뒤 '약연약을 빻는 사발에 넣어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냄비에 넣고 끓여 냈지만, 찻잎 외에 소금과 파, 대추, 박하, 생강 등도 첨가하였다고 한다.

중국 당나라 시대의 이백766~822을 비롯한 수많은 시인과 문호들이 차를 즐김으로써 차를 마시는 문화가 뿌리를 내렸는데, 이때부터 차의 생산과 소비가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중국의 차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일본 천태종의 창시자인 사이초766~822를 비롯한 당나라에 파견되었던 사신들이 805년경 중국에서 차를 갖고 귀국한 것이 시초였다고 한다.

송나라 시대(960~1279년)로 들어서 차의 가공 기술도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병차의 가공법이 보다 더 정교해지고 호칭도 바뀌어 '편차'와 경단 모양의 '단차'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음용법은 찻잎을 가루로 만들어 그릇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대나무로 된 '차선'이라는 도구로 휘젓는 일본의 '맛차'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한다.

왕실과 상류칭에서는 만드는 일도, 우려내는 일도 많은 노력들이 필요한 '용봉차'라는 단차를 즐겨 마셨다. 신차 계절에는 '투차'가 빈번하게 벌어졌는데, 차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 차 문화의 황금기

명나라 시대(1368~1644년)에는 서민들이 즐기는 문화로서 차 문화가 정착하였지만, 차의 존재 형태는 크게 변천해 나갔다. 명나라 초대 황제인 주원장1328~1398, 즉 홍무제는 단차는 차 본연의 맛을 잃게 하고 가공에도 손길이 많이 간다는 이유로 '단차 금지령'을 내렸다. 그 뒤 차를 만드는 방식의 추세는 고형차에서 벗어나 잎차 형태의 '산차'로 변화해 나갔다.

또 그 때는 차와 말을 거래하는 '차마무역'이 성행하여 차가 군사 교섭에 이용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진나라 시대부터 오랫동안 이어져 온 공차 제도가 폐지되고, 공차가 차마무역용이 된 것도 산차 보급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차의 가공 방식도 증기로 찌는 증청 방식에서 벗어나 가마솥에 덖어 향과 찻빛이 진해지는 '초청'방식이 탄생하였다. 남은 단차에 자스민 등의 꽃향기를 첨가한 '화차'와 홍차의 가공도 시작되었다. 더욱이 절강성의 서호용정과 안후이성의 황산모봉 등의 녹차도 널리 유명해지면서 차의 생산이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다기의 문화도 발달하였는데, 장쑤성 이싱시의 차 항아리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오 이때부터였다.

명나라 말기에는 최고의 희소가치를 자랑하면서 중국 차 중에서도 최고봉으로 불린 '무이암차'(암벽에 자라는 차나무로부터 만든 우롱차의 일종)가 상류 계층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1600년대에 이르러 차가 유럽으로 건너가면서 홍차가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청나라 시대(1616~1912년)의 광둥성에서는 오늘날에 흔히 마시는 차의 원형이 생겨났다. 중국 차의 가공 방식과 차 도구가 완벽히 갖춰지면서 차 문화는 황금기를 맞은 것이다. 푸젠성에서는 청차가 탄생하고, 오직 청차만의 방향을 추구하게 되었다.

전쟁의 발단이 된 차

차가 유럽으로 수출되기 시작하면서 영국을 중심으로 총차 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국과의 차 무역 거래에 은화만 사용된 것이 중국 차의 발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급기야 은화가 고갈되어 지급 능력을 잃은 영국은 식민지인 인도에서 양귀비로부터 추출한 아편을 교환 물품으로 청나라로 수출하여 은을 회수하려고 나선 것이다.

'경제학의 탄생국'이라 할 영국의 그러한 계획대로 은이 대량으로 유출되면서 청나라는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아편 흡입으로 인해 사회는 큰 혼란이 초래되었다. 결국 1839년 청나라가 아편 밀수입을 강력히 규제하면서 그 이듬해 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

그 뒤 영국, 프랑스, 청나라, 러시아가 체결한 베이징 조약(1860년)에 따라 영국과 독일이 중국 차 무역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홍차 이외에 중국 차의 수출은 감소하였고, 생산도 하락하게 되면서 다원과 가공시설이 쇠퇴하게 되었다.

중국 차의 생산이 다시 활기를 띤 것은 역설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뒤부터이다. 정치 지도자 마오쩌둥1893~1976의 문화 대혁명1966~1976에 의해 '차는 사치품'으로 간주되어 차나무의 재배가 제한되면서 서민들이 차를 자유롭게 마실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풍선효과인지 역설적으로 타이완에서 차나무의 재배가 늘어나면서 우롱차의 명산지로서 기반이 구축되었다. 우롱차를 우리는 중국 차 특유의 다례인 '공부차'도 발달하면서 '동방미인'과 같이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는 명차가 탄생한 것이다. 1980년대부터는 우롱차가 중국 차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